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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도시서울

위안부 할머니 마음에도 봄이 오기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더 이상 아프고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그네들이 제대로 사죄를 할때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회복될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 합의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른 정부, 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소녀상을 지키는 친구들이 있는한, 희망의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위안부 할머니에게도 따뜻한 봄이 찾아 왔으면 좋겠다.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가 함께 발간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과 관련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연회에 서울미디어메이트로서 참석을 했다.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면, 슬프다 아프다 괴롭다라는 감정이 들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14, 15, 16살 꽃다운 어린 여자아이가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차 타고, 배를 타고 힘들게 도착한 그 곳은, 지옥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년이 흐른 뒤라고 한다. 1988년 일본 남성들의 한국성매매 관광(일명 기생관광) 문제를 논의하던 한 세미나에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성매매 관광의 역사적 뿌리이며, 정치침탈, 경제침탈, 군사침탈이 일어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오늘날의 문제임이 역설되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TV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때부터 한명, 두명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번째 수요 시위가 열렸다.



154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한장 한장 넘기는게 너무 힘들었다. 나름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00년 12월 여성국제전범법정의 남측 대표 검사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당시 피고로 기소된 히로히토 일황과 옛 일본군 간부 등은 인간의 노예화, 고문, 살인, 인종적 이유 등에 의한 박해 등을 금지하는 인도에 대한 죄를 위반했다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17년이 지났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서울시는 위안부 실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 및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했다. 정부가 못한 일을 서울시가 하는거다. 서울시민으로서 참 뿌듯하다. 



김복동 할머니의 인사말. 몸이 많이 불편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통령이 역사를 팔아먹어 지금도 여전히 정부와 싸우고 있다. 아직도 한을 다 풀지 못했다. 1억원 받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다. 우리들도 귀한집 자식이다. 일본 정부의 사죄와 명예회복이 될때까지 싸우겠다.


  

양산에서 부산 - 시모노세키 - 대만 - 광동 - 홍콩 - 수마트라섬 - 싱가포르까지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는 1926년 5월 1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그리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는데, 보증이 잘 못 돼서 땅을 읽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만15세때, 일본사람이 찾아와 데이신타이(정신대)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 놓으라고 했다. 그사람은 어머니에게 데이신타이는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끌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중국 광동에 도착했다. 위생병원 같은 곳으로 가서 일본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다. 검사 후 어떤 건물로 갔는데, 거기가 바로 위안소였다. 복도 사이로 양 옆에 방이 주욱 있었는데, 방이 30개는 되었던 거 같다. 그날 밤 낮에 우리를 검사한 군의관이 내방으로 들어왔다. 무서워서 도망쳤으나 곧 잡혔다. 한참을 맞고 나니 얼굴 전체가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틀날 방에서 나오니 여자들이 저마다 피빨래를 하고 있었다.



홍콩 위안소에서 석달쯤 있다가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민간에서 외진 곳으로 멀리에서 대포소리가 자주 들렀다. 가끔 산 속 갚은 곳의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천막 하나를 임시 위안소로 만들어 놓고 합판으로 칸을 나누어 서너 명씩 들어가도록 했다. 군인들이 하도 많이 들이 닥쳐서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몇 달 있다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이동을 했다. 어느 날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 보름 후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차를 타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그 곳은 제10 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는 우리 같은 여자들이 300명정도 와 있었다. 열 다섯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물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5년만이었다. 현재 김복동 할머니는 전 세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인권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박원순 시장은 인사말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니라 정의라고 말했다. 일본정부는 10억엔을 출연하고 우리 정부는 화해와 치유라는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어 할머니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 줬다. 화해와 치유는 그렇게 되는게 아니고 오직 진정한 사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남산 통감관저 터 자리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기억의 터가 새로 조성됐다고 한다. 3·1절이 얼마남지 않았다. 아픈 역사이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다녀와야겠다.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는데, 우리 할머니에게도 새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원문전체보기 - http://www.overniceonion.com/1122 서울미디어메이트 남혜경